"어떤 미친 XX냐?" 월드컵이 불러온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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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프랑스 월드컵 때의 섬뜩한 경험, 2018년 악몽으로 되풀이되다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다. 축구도 축구지만, 흥겨운 라틴 리듬의 주제가 덕에 월드컵 기간 한 달 동안 마냥 어깨가 들썩였던 행복한 순간이었다. 당시 월드컵 우승팀이 어느 나라였는지는 몰라도, 주제가 '더 컵 오브 라이프(The cup of life)'를 모르는 이는 없을 정도였다. 노래를 부른 가수 리키 마틴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축구팬들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월드컵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와의 조별 경기에서 무기력하게 5-0 참패를 당하면서, 도중에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세계 축구와의 엄연한 수준 차이는 승리를 갈구하는 국민적 기대에 묻혀버렸고, 4년 뒤 '4강 신화'까지 더해지며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뇌리에 '역대급 참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 경기를 호프집에서 지인들과 맥주잔 부딪히며 시청했다. 온 국민이 빨간 옷으로 '깔맞춤'하고 광장에 모였던 2002년 때의 모습에 견줄 수는 없다 해도, 월드컵에 대한 관심과 응원의 열기는 그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한밤중이었는데도 꽤 넓은 홀에 빈자리가 거의 없었을 만큼 손님이 꽉 찼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서 무슨 안주를 시켰는지조차 알고 있을 만큼 당시의 기억이 또렷한 이유가 있다. 조금은 '섬뜩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데면데면하게 자리에 앉아있어야 했다.
20년 전, 나는 왜 욕을 먹었나... 그리고 김민우 선수
내용인즉슨 이렇다. 현재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PSV 아인트호벤의 감독으로 있는 필립 코쿠가 첫 골을 넣었을 때다. 한때 박지성 선수와 함께 뛴 네덜란드의 전설적 미드필더다. 박스 근처에서 우리 수비수 서너 명을 제치고 반대쪽 포스트를 향해 쏜 터닝슛이 골문을 가르는 장면이었다. 예상치 못한 동작인 데다 워낙 속도가 낮고 빨라 골키퍼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요즘이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스페인의 라리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골이지만, 그때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한창 축구의 묘미에 빠져 퇴근하자마자 축구화를 갈아 신고 운동장에서 리프팅과 셔틀 런 연습을 하던 때라, 네덜란드 선수들의 현란한 발재간과 패스워크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기 안 풀리네' 2018 러시아월드컵 대한민국 대 스웨덴 경기가 열린 지난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아쉬운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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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해설자의 목소리에도 묻힐 만큼 옅은 박수소리였지만, 호프집 안 모든 손님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나를 향했다. 스크린 바로 앞쪽에 앉아있던 한 사람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어떤 미친 XX냐?"며 한바탕 욕설을 쏟아냈다. 얼마 뒤 연이어 골이 들어가자, 한숨소리조차 사라질 만큼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경기가 끝난 뒤 내 박수 탓에 참패한 거라며 농을 거는 이도 있었다.
갑자기 20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 건, 한 방송에서 '김민우 선수의 인터뷰'를 보고서다. 그는 지난 스웨덴과의 전반전 때 갑작스레 부상을 당한 박주호 선수를 대신해 수비수로 출전했다. 몸도 덜 풀린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으나, 박스 안에서 태클의 실수를 범해 결과적으로 1-0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자책 때문인지 그는 경기 내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쉬지 않고 뛰었다.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스웨덴 공격수를 괴롭혔고, TV 화면에 이를 악문 그의 모습이 언뜻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야속하게도 현지 카메라는 연거푸 그를 비추었고, 기성용과 손흥민, 정우영 등 선배들로부터 위로를 받는 장면이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가십거리처럼 계속 다루어졌다.
결국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멈춰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 눈물을 훔쳐야했다.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선수들의 하나같은 소감이기도 하다. 연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눈물을 닦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니 국가대표팀에 연일 쏟아지는 온갖 비난의 화살을 오로지 그가 받아내고 있는 듯했다.
카메라 앞 앳된 선수의 주눅 든 얼굴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깟 한 경기 졌다고 나라를 잃은 설움처럼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은 대체 월드컵 나아가 축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들게 한다. 그들은 월드컵이라는 축제에 국가를 대표해서 축구를 하러 간 것이지, '독립운동'을 하러 간 게 아니다. 차라리 그가 이렇듯 당차게 인터뷰했다면 어땠을까.
'정말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해 아쉽습니다. 더욱이 제 실수로 경기를 그르친 꼴이 됐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경험 부족에다 젊은 패기가 지나쳤다고 국민들께서 너그러이 헤아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 실수를 거울삼아 다음 경기에선 더욱 분발하고 경계하며 최선을 다해 뛰겠습니다. 부디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 그라운드에 주저 앉은 김민우 지난 18일(현지시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1차전 대한민국과 스웨덴의 경기. 스웨덴에 0-1로 패한 한국의 김민우가 아쉬워하고 있다. |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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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기다리며 축구 하는 재미에 빠져 살던 10여 년 전쯤, 발기술과 포메이션 등을 가르쳐주던 한 지인이 건넨 우스갯소리를 기억한다. 그는 축구팬으로 공인받을 '자격 조건'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이 둘 중에 하나라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축구를 사랑하는 진정한 팬이라 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축구팬이 갖춰야 할 2가지 '자격 조건'
첫 번째는 국가 간 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평상시 축구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월드컵 등 국가 간 경기에만 열광하는 건 축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국가 간 축구 경기를 전쟁에 빗대고, 선수를 '전사'라고 표현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국뽕 축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하긴 국가 간 경기에는 관중석을 가득 메우지만, 국내 케이 리그 경기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와 관중들의 숫자가 같다는 조롱이 나올 만큼 썰렁하다. 국내 케이 리그는 몇 팀이 있는지도 모르고, 국가대표 외에는 이름을 아는 선수가 거의 없는 척박한 환경이다. 말하자면, 팬으로서 축구를 스포츠로 즐길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누가 이기고 졌느냐보다 전략 전술과 개인기 등 경기 자체에 의미를 둔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승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현란한 개인기와 골이 들어가는 전개 과정에 감동한다고 했다. 수준 높은 경기였다면 설령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졌다 해도 기꺼이 박수를 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은연중 물들어 있는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건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를 조롱하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이구동성 중동 국가들의 '침대 축구'를 경멸하지만, 이 역시 이기기 위한 나름의 전략 전술일 뿐이다. 승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외려 축구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의 기준대로라면, 우리나라에 축구팬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떻게든 이기면 영웅 대접을 받고, 이번처럼 지기라도 하면 온갖 조롱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우리 국민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반응을 모를 리 없는 선수들은 늘 수준 차를 투지로 극복하도록 요구 받았고, 단 한 번의 실수라도 패배의 빌미가 되면 김민우 선수처럼 눈물로서 속죄해야 했다.
'국뽕 축구'는 이제 그만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TV 중계마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되레 부추기고 있다. 압권은 얼마 전 치러진 일본과 콜롬비아의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였다. 한 공중파 방송의 해설자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노골적으로 콜롬비아 편에 섰다. 함께 보고 있던 지인은 축구 해설자가 아니라 차라리 '항일 투사'라며 어이없어했다.
전반 3분, 골키퍼가 넘어져있는 텅 빈 골문 앞에서 팔을 뻗어 공을 막은 콜롬비아 수비수에게 레드카드를 꺼낸 심판의 판정에 과도하게 불만을 내보이는가 하면, 콜롬비아의 프리킥 만회골을 마치 우리 선수가 넣은 것처럼 기뻐하기도 했다. 일본 선수의 슛을 막아야 한다며 고함을 내지르기도 했고, 콜롬비아 선수의 파울에 유독 관대했다. 언어만 아니라면, 콜롬비아인 해설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만약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였대도 콜롬비아 선수들의 거친 파울을 문제 삼지 않고, 심판의 레드카드가 심하다고 지적했을까. 개인적으로 일본이 지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명색이 해설자라면 철저히 중립적 입장에 서야만 한다. 편파적인 해설은 팬들의 축구 경기에 대한 온전한 감상을 방해한다.
▲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일본과 콜롬비아의 경기. 이날 일본은 콜롬비아 선수 1명이 퇴장한 가운데 2-1로 콜롬비아를 누르고 1승을 올렸다. |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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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도 아니고, 다른 나라와의 경기인데도 일본의 선전을 비하하려는 건 '자격지심'이라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안타깝게 졌는데, '앙숙' 일본이 이기는 건 배가 아프다는 것. 피파의 규정에도 강조돼 있듯, 축구를 정치와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 축구 경기에 반일 감정을 담는 순간, 축구는 스포츠가 아닌 전쟁이 되고 만다.
애써 일본 축구를 폄하한다고 해서 우리의 축구 수준이 높아질 리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국내 리그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고 경기장을 지속적으로 찾는 게 일본 축구를 이기는 지름길이다. '국뽕 해설'은 맹목적인 '국뽕 축구'를 부추길 뿐, 정작 축구 발전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부탁하건대, 김민우 선수를 비롯한 선수들 누구든 설령 졌다고 소심해질 필요 없다. 16강 진출이라는 집단적 주술과 국위 선양이라는 고루한 망령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그대들은 세계무대에 나가 기량을 겨루는 축구 선수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부디 가슴에 새겨진 태극기에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원 없이 즐기고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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