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필라델피아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시즌 초반부터 게이브 케플러 감독의 불펜 운영이 논란을 불러왔고, 제이크 아리에타가 팀 수비 시프트 전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필라델피아의 디펜시브런세이브 -59는 메이저리그 전체 29위). 케플러 감독은 며칠 전에도 무분별한 마무리 기용으로 비판을 받았는데, "우리 팀에 켄리 잰슨이 있었으면 나도 마무리 투수를 고정했을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애런 놀라(25)는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제 워싱턴 타선을 7.2이닝 1실점으로 제압하고 시즌 10승째를 손에 넣었다. 이는 맥스 슈어저(워싱턴) 존 레스터(컵스)와 더불어 리그 최다승. 놀라 이전에 전반기 10승을 확보한 필라델피아 투수는 2013년 클리프 리(10승)였다.
놀라는 원래 기대치가 높은 선수였다. 고교 때 이미 토론토의 지명을 받았었다(2011년 드래프트 22라운드). 루이지애나주립대(LSU) 마지막 두 시즌도 훌륭하게 보냈다(23승2패 1.52). <베이스볼아메리카>는 2014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놀라에 대해 '이번 드래프트에서 가장 안정적인 도박' 이라고 평가했다. 전체 7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필라델피아가 위험 부담이 적은 이 선택을 했고, 현재 어느 팀보다 큰 보상을 받고 있다.
2014 드래프트 승리기여도(bWAR) 순위
10.1 - 애런 놀라(7)
9.3 - 트레이 터너(13)
7.4 - 맷 채프먼(25)
7.1 - 마이클 콘포토(10)
6.8 - 카일 프리랜드(8)
5.1 - 카를로스 로돈(3)
3.4 - 조던 몽고메리(122)
3.2 - 카일 슈와버(4)
3.2 - 션 뉴컴(15)
마이너리그에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더블A 7승3패 1.88, 트리플A 3승1패 3.58). 이듬해 7월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도 6이닝 1실점으로 인상적인 출발을 했다. 필라델피아는 열흘 뒤 10년 동안 팀을 지켜준 콜 해멀스를 텍사스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해멀스와 비슷한 레퍼토리를 갖춘 '우완 해멀스' 놀라가 향후 10년을 지탱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내 날벼락이 떨어졌다. 2016년 메이저리그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내던 중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 부상 부위는 내측측부인대(UCL)와 굴곡근-회내근(flexor pronator)으로 토미존 수술까지 받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결국 놀라는 마지막 8경기 참담한 성적(1승5패 9.82)으로 일찍 시즌을 마감. 파열된 정도가 심하지 않아 수술을 피한 것이 천운이었다. 자가혈청주사(PRP)를 맞으면서 휴식을 취한 놀라는 팀이 정해준 프로그램을 따르면서 재활에 몰두했다. 그리고 2017년 스프링캠프에 정상적으로 합류했다.
허리 부상으로 또 다시 한 달을 결장했지만, 5월말에 돌아온 놀라는 달라져 있었다. 경기 중 휘청거려도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남은 24경기 중 19경기에서 6이닝 이상 피칭. 복귀 후 소화한 152이닝은 같은 기간 코리 클루버(166.1)에 이은 2위였다. 놀라가 올린 승리기여도(fWAR) 4.3은 클레이튼 커쇼(4.6) 제이콥 디그롬(4.4)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수비 배제 평균자책점(FIP) 3.27은 리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2017 NL 선발 FIP 순위
2.72 - 스트라스버그
2.90 - 슈어저
3.05 - 넬슨
3.07 - 커쇼
3.27 - 놀라
3.31 - 그레인키
3.50 - 디그롬
성장통을 이겨낸 놀라는 투수로서도 한층 성숙해졌다. 놀라는 대학 시절부터 폭발적인 강속구를 던진 투수는 아니었다. 대신 당장 플러스 피치로 쓸 수 있는 커브를 가지고 있었다(커브는 검지손가락을 옮기면서 더 변화무쌍한 구종이 됐다). 놀라는 100마일을 던지는 것보다 중요한 덕목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웃카운트를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수들의 구속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오늘날 강속구만으로는 타자들을 제압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이에 구속을 끌어올리는 노력보다 구종을 늘리는 방법을 연구했다. 놀라가 맞아나가면서도 투심(싱커)과 체인지업을 놓지 않은 이유였다.
놀라 투심 & 체인지업 점유율
15 [투심] 23.1% [체인지업] 11.6%
16 [투심] 43.2% [체인지업] 08.5%
17 [투심] 25.4% [체인지업] 15.9%
놀라 싱커 & 체인지업 피안타율
15 [투심] .264 [체인지업] .312
16 [투심] .284 [체인지업] .342
17 [투심] .315 [체인지업] .312
놀라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평균구속 90마일 중반대 패스트볼과 70마일 후반대 커브, 여기에 80마일 중반대 체인지업이 피칭의 효율성을 높여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체인지업을 완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많은 투수들이 롱런을 위해 체인지업 장착을 시도하지만, 체인지업은 모두에게 허락된 공이 아니었다.
사실 놀라에게 체인지업은 완전히 생소한 영역은 아니었다. 놀라는 고교 시절 뛰어난 체인지업을 가지고 있었다(본인피셜). 최소한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체인지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그 속에서 성과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립을 조정해보고, 영상으로 비교 분석도 했다. 팔 스피드와 위치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최대한 패스트볼처럼 던지는데 집중했다.
끊임없이 체인지업을 부른 결과, 마침내 체인지업이 응답했다. 줄곧 3할대를 넘던 체인지업 피안타율이 올 시즌 .221까지 떨어졌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체인지업 구사율이 높아진 점도 눈에 띄는 변화. 지난해 좌타자에게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체인지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이 약점도 해결했다(좌타자 상대 피ops .738→.560).
투 스트라이크 이후 체인지업 구사율
(2015) 8.3%
(2016) 4.5%
(2017) 11.0%
(2018) 23.5%
패스트볼-커브 투 피치 투수에서 네 개 구종을 자유자재로 던지는 투수가 된 놀라는 심지어 데뷔 후 가장 빠른 포심 평균 구속을 기록하고 있다(93.2마일). 마이너리그 투수코치 카를로스 아로요의 조언으로 하체를 좀더 활용하면서 일어난 변화다. 또한 놀라는 내구성이 약한 이미지를 벗어나고자 신체 역학을 스스로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놀라는 최근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즐겨 던지는 하이 패스트볼 전략을 따르지 않는다.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 놀라는 세인트루이스 마이크 리크(현 시애틀)가 나온 등판을 주의깊게 지켜봤다. 투수코치가 무엇을 그렇게 유심히 보는지 묻자, "굉장하네요. 무릎 위로 들어오는 공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답했다. 그때부터 놀라의 피칭 스타일은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낮게, 더 낮게' 가 됐다. 올 시즌 스트라이크존을 삼등분 했을 때 하단에 가장 많은 공을 던진 투수는 누구였을까. 전체 24.1%를 그 곳에 던진 놀라였다.
스트라이크존 하단 최다 투구
399 - 애런 놀라
370 - 제임스 실즈
346 - 클레이튼 리차드
342 - 마이크 클레빈저
340 - 랜스 매컬러스 주니어
323 - 마이크 리크
323 - 펠릭스 에르난데스
320 - 션 머나야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이 쏟아지는 시대는 놀라에게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9이닝당 피홈런 0.50개는 디그롬(0.44개) 다음으로 리그에서 적었다(ML 최소 트레버 바우어 0.42개). 탁월한 구속 조절과 '낮게, 더 낮게' 피칭은 타자들이 강한 타구를 만드는 것을 방해했다. 올 시즌 놀라보다 강한 타구 비율이 적은 투수는 크리스 세일(보스턴) 뿐이다.
강한 타구 비율 최저 (%)
26.1 - 크리스 세일
26.7 - 애런 놀라
27.7 - 저스틴 벌랜더
27.8 - 제이콥 디그롬
27.9 - 트레버 윌리엄스
올 시즌 필라델피아는 기대를 뛰어넘는 시즌을 보내고 있다. 야수 승리기여도 20위(7.5) 불펜 승리기여도 11위(2.4)에 불과하지만, 선발 승리기여도가 전체 3위이자 리그 1위(9.3)에 올라있다. 아리에타의 합류(5승6패 3.54) 잭 에플린의 성장(6승2패 3.02)이 힘을 보태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단연 놀라의 활약(10승2패 2.48)이 절대적이다.
칭찬에 인색한 아리에타(사진)는 놀라를 두고 "30대처럼 던지고 있다. 사이영상 두 개 정도는 받은 투수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컵스 시절 레스터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처럼, 자신도 놀라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멘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리에타는 놀라를 비롯해 젊은 투수진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필라델피아가 '판타스틱 4(할러데이 리 해멀스 오스왈트)'를 구축하면서 리그를 호령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판타스틱 4'가 해체되면서 필라델피아의 영광도 끝이 났지만, 또 다시 그 영광을 재현해줄 수 있는 투수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당시 '판타스틱 4'가 전성기가 지나는 시점이었다면, 놀라는 이제 막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상태다.
과연 놀라는 필라델피아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낼 수 있을까. 나아가 슈어저의 대항마로도 거듭날 수 있을까. 일단 현재로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