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올스타 선발과 47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세운 7월 9일. 추신수한테는 어느 날보다 길고 의미있는 하루였다.>
9일(한국시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원정 4차전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경기 후 보스턴으로 이동하는 걸 대비해 미리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제프 배니스터 감독님이 갑자기 미팅을 소집하더군요. ‘시리즈 마지막 날 무슨 미팅이지?’하며 의아해하는데 감독님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있었습니다. 가볍게 봉투를 흔들던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줄 일이 있다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시즌 내내 많은 선수들이 고생하고 열심히 뛰었지만 올스타에 초대 받은 사람은 안타깝게도 한 명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이름의 주인공을 이 자리에서 내가 직접 소개할 수 있게 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선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은 커리어에 비해 상당히 저평가를 받았습니다. 난 그 점이 항상 불만이었고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오늘, 비로소 그 안타까움이 조금은 해소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선수의 나라에서, 또 가족들이 엄청난 기쁨과 환호를 담은 응원의 박수를 보내줄 것이 분명하기에 이전의 안타까움을 묻고 올스타에 선정된 걸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습니다. 이 봉투의 주인공은 바로 신수 추, 당신입니다!”
감독님이 처음 말씀을 꺼내셨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 대상이 저인 줄을요. 그러다 ‘나라’ 얘기가 나왔을 때 감이 왔습니다. 저라는 사실을. 올스타에 뽑혔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모든 선수들이 있는 자리에서 절 소개하는 감독님의 말씀이, 내용이, 축하가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습니다. 감독님이 이름을 거론하기 전부터 이미 선수들은 하나둘 씩 제게 다가와 포옹과 축하 인사를 건넸고 감독, 코칭스태프, 트레이너에다 클럽하우스 매니저까지, 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때 벨트레가 다가와 제게 이런 말을 해줍니다. “You deserve that(넌 충분히 자격이 있어).”
경기를 앞두고 감정 조절이 안 될 정도의 큰 선물을 받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가장 먼저 아내한테 연락을 취했고 이후 부모님에게도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내는 디트로이트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저도 눈물만 흘리지 않았을 뿐 아내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장면부터 떠올랐습니다.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40도가 넘는 땡볕에 앉아 햄버거를 먹던 모습, 마이너리그 원정 경기 다니며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했던 상황들, 또 이사를 가려고 차 한 대에 모든 짐을 싣고 아내와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갔던 순간들, 마이너리그에서 홈런치면 관중들이 1달러씩 모아준 돈을 통에 담아 아내한테 전해줬던 일들. 아내는 그 1달러들을 다리미로 빳빳이 다렸었죠. 루키에서부터 시작해 트리플A까지 올라가는 동안 겪고 견뎌냈던 에피소드들은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런 오랜 시간들이 짧은 순간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걸 느끼며 새삼 야구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이제 경기에 나가야 할 시간. 컨디션은 좋았습니다. 흥분된 마음만 가라앉힌다면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상대 투수가 7타수 무안타의 마이크 풀머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2회 1사 1,2루에서 1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타구를 날리면서 1루 베이스를 밟았고 2루에 있던 아이재아 카이너 팔레파는 홈 베이스로 들어갔는데 그게 안타와 타점이 아닌 실책으로 기록되더군요. 4회에는 초구를 노렸지만 좌중간 담장 앞에서 잡혔고 7회에는 초구 병살타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데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다음 타석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7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 여기까지인가 보다. 역시 하늘에서 두 가지 선물은 안 주는 구나’하며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8회 1사 만루 상황. 타석에는 조이 갈로가 들어섰습니다. 조이 갈로가 삼진이나 출루하게 되면 저한테 한 차례 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중해서 지켜보고 있는데 병살타로 마무리됐습니다. 그 병살타는 조이 갈로의 올시즌 첫 번째 병살타라고 하더군요.
<로널드 구즈먼의 9회 안타에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추신수.>
9회 초 첫 번째 타자가 아이재아 카이너 팔레파였습니다. 땅볼 아웃으로 1아웃. 두 번째 타자가 로널드 구즈먼이었죠. 2볼1스트라이크에서 4구째 안타를 치고 1루로 뛰어가는 모습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멈출 뻔했던 기록이 기사회생의 순간으로 다가온 것이죠. 장갑을 다시 끼고 방망이를 들고선 대기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카를로스 토치가 병살타만 안 친다면 마지막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토치의 삼진 아웃이 고의라는 얘기도 하던데 선수한테 직접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토치가 삼진으로 물러나고 타석에 들어서는데 살짝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드라마도 이렇게는 만들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투수는 처음 상대해보는 빅터 알칸타라. 처음 보는 투수라 초구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공 하나를 기다린 후 잠깐 더그아웃을 쳐다봤는데 모든 선수들이 일어나서 저를 주시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체인지업에 배트를 휘둘렀고 시프트가 아니었다면 3루수가 잡을 수 있는 땅볼이 내야 안타가 되면서 기어이 출루에 성공하게 됩니다.
타격 후 1루 베이스를 향해 뛰는데 더그아웃에서 “헤이 추, 고고 렛츠고!”라며 소리치는 선수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도어가 가장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허벅지 보호를 위해 전력질주를 안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스피드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달리고 보자는 마음으로 1루 베이스를 향해 뛰었습니다.
우리 팀 더그아웃은 난리가 났습니다. 47경기 연속 출루에 성공하며 구단 신기록을 달성한 사실에 선수들은 환호했고 디트로이트 팬들은 축하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1루에서 난리가 난 레인저스 더그아웃을 보는데 또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자신의 기록도 아니지만 마치 자신이 달성한 기록마냥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선수들을 보며 ‘내가 잘 살았구나’, ‘내가 그래도 인정은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기 후에는 불펜에 있던 투수들은 물론 미디어들도 절 찾아와 포옹을 주고 받았습니다.
실감이 안 나면서도 기분 좋고, 어디서 펑펑 울고 싶은데 애써 참아야 하고. 만약 제 옆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면 그냥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겉으로 올스타전 선발이나 연속 출루 신기록 달성과 관련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솔직히 기대 많이 했습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하면 실망이 클 것 같다는 생각에 애써 아닌 척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올스타 발표 전, 잔뜩 기대하는 아내에게 “그냥 올스타 휴식기 동안 4일 쉬고 후반기 준비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가 한소리 들었습니다. “자기야 우린 10년 동안 올스타전 때마다 4일을 쉬었어. 쉬는 건 시즌 끝나고 푹 쉬어도 돼”라고 말이죠. 아내의 기대와 바람이 현실로 이뤄진 게 정말 기쁩니다. 디트로이트와의 경기를 마치고 라커로 돌아가니 아내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남자랑 함께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때론 안 좋은 일도, 부상도, 슬럼프도 있었지만 그걸 모두 이겨낸 당신을 지켜보며 존경할 수밖에 없었어. 당신은 이 선물들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야. 정말 정말 정말 축하하고 사랑해.’
어제 경기 후 보스턴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녁은 선수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트레이너들과 함께 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에 많은 역할을 해주신 분들이라 가장 먼저 마음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트레이너들도 엄청난 보람을 느낀다고 얘기하더군요.
지난 번 일기에서도 언급했지만 7월에 받은 이 선물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게 아닙니다. 선수단 모두의 힘과 희생과 도움이 있었기에 소중한 기록이 달성되었고 생애 최초의 올스타 선발을 경험하는 행운이 함께 했습니다. 일부에선 제가 너무 늦은 나이에 올스타에 선발됐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이 일을 경험했다면 그 소중함을, 그 간절함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보내주신 응원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때론 칭찬으로, 때론 쓴소리로 절 자극하고 격려해주신 팬들이 있기에 저도 더 열심히 야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사연이 담긴 제 일기에 2018년 7월 9일에 벌어진 드라마 같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행복할 따름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야구 인생을 이어온 추신수. 쓰러지고 넘어질 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기에 2018년 7월 9일의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 이 일기는 추신수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