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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뉴스

KCC 오그먼 감독의 그 때 그 시절 ① 서울 올림픽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 털보티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4-07 댓글0건

본문

 

 

 

KCC 스테이시 오그먼 감독은 KBL과 인연을 맺은 NBA 출신 중 최고의 경력을 자랑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어 한국과 인연을 맺은 바 있으며, 1991년 애틀란타 호크스를 시작으로 2006년까지 16년 동안 NBA 선수로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덴버 너기츠, 밀워키 벅스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오그먼 감독은 네바다 주립대(UNLV) 재학 시절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날리며 1990년 NCAA 우승도 경험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모교 UNLV에서 오그먼 감독의 등 번호 32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고, UNLV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지난 3월 오그먼 감독을 만나 서울 올림픽과 대학 재학 시절, NBA 선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오그먼 감독과 주고받은 서울 올림픽과 관련한 일문일답이다. 

최연길 해설위원(이하 최)_ 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게 되었는데 다시 오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오그먼 감독(이하 오)_ 일단 도전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도전을 원하고, 변화를 원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단 측 관계자가 접촉을 했을 때 좋게 설명을 해서 거기에 호의를 느꼈습니다. 

최_ 그럼 먼저 30년 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대표 명단에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오_ 국가대표 선발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어요. 현재까지도 최연소 국가대표로 남아 있어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최_ 당시 멤버들이 쟁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비 명단에 있던 션 엘리엇, 렉스 채프먼, 스테이시 킹, 알론조 모닝 등이 제외되고 감독님께서 뽑혔습니다. 
(당시 미국 대표팀은 데이빗 로빈슨, 대니 매닝, J.R. 리드, 찰스 E. 스미스, 찰스 D. 스미스(빅맨), 스테이시 오그먼, 댄 멀리, 제프 그레이어, 빔보 콜스, 허시 호킨스, 미치 리치몬드, 윌리 앤더슨으로 12명이었으며, 탈락자 명단에는 알론조 모닝, 션 엘리엇, 스테이시 킹, 스티브 커, 렉스 채프먼 등이 있었음)

오_ 당시 감독이던 존 톰슨(당시 조지타운 대학 감독, 최초의 흑인 미국 올림픽 남자 농구 대표팀 감독)께서 수비 위주의 농구를 추구했기 때문에 수비로 인정을 받아 제가 뽑혔고 다른 재능 있는 선수들이 탈락하게 된 것 같습니다.


최_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소련에게 패한 이후 1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에게 패해 맞대결이 성사되지 않았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이, 1984년 L.A. 올림픽에는 소련이 불참함) 부담이 없었나요? 

오_ 굉장히 분위기가 과열되어 있었고, 굉장히 압박도 많았고,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죠. (우리는) 다들 아마추어였는데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면서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최_ 당시 국가대표에 대한 미국 농구협회의 지원도 상당했습니다. 유럽 투어도 진행되기도 했죠(미국은 국가대표 선발 후 유럽 투어를 진행했고, 6전승을 거뒀음).

오_ 미국 먼저 투어를 하고, 유럽에서도 투어를 하는 등 큰 지원이 있었고,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최_ 유럽 투어 전에는 NBA 선수들로 구성된 NBA 셀렉트 팀과 3차례 경기를 치렀습니다. 

오_ 네, 미국 내에서 치렀습니다. 그때 엄청난 지원을 받았고, 모든 경기가 매진되었습니다.

최_ 당시 NBA 셀렉트 팀에는 패트릭 유잉,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같은 선수들이 포함되었는데 모두 이겼습니다. 

오_ 네, 우리가 그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흥분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차전은 1988년 8월7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의 시빅 센터에서 열렸음. ABC에서 전국 중계방송을 했고, 당시 해설은 유명해설자인 딕 바이텔이었음. 또한 당시 심판은 NBA의 전설적인 심판 조 포르테와 KBL 심판위원장을 지낸 제시 톰슨이 맡음. NBA팀에는 패트릭 유잉, 크리스 멀린, 앨빈 로버트슨 등 1984년 대표팀 멤버와 테리 커밍스, 로드니 맥크레이, 마이클 애덤스, 케빈 덕워스, 슬리피 플로이드 등이 포함되었음. 경기 결과는 90-82로 미국 대표팀의 승리였음.

2차전은 1988년 8월12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의 샬럿 콜리시움에서 열림. 방송은 USA 스포츠 채널에서 중계. 당시 NBA팀은 켈리 트리퓨카, 찰스 바클리, 알튼 리스터, 대니 에인지, 시그린, 찰스 오클리, 크리스 멀린, 케니 스미스, 슬리피 플로이드 등으로 구성. 경기 결과는 81-80로 미국 대표팀의 승리였음. 

3차전은 1988년 8월14일 역시 샬럿 콜리시움에서 펼쳐짐. 방송은 올림픽 주관방송사 NBC가 담당. 해설은 알 맥과이어. 당시 NBA팀 선수는 찰스 바클리, 마크 잭슨, 패트릭 유잉, 마이클 조던, 알렉스 잉글리시, 알튼 리스터, 존 루카스, 크리스 멀린, 웨이먼 티스데일, 대니 쉐이즈, 먹시 보그스, 스퍼드 웹 등이었음. 경기 결과는 95-84로 미국 대표팀의 승리였음)


최_ 서울 올림픽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소련을 피하는 등 조편성이 좋았기 때문에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선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을 꺾어 미국과 소련이 준결승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경기 전 분위기는 어땠나요?

오_ 당시 우려되었던 것은 그쪽 선수들은 오랫동안 함께 뛰었고, 경험이 많고, 더 세고, 완성형 선수들인데다 똑똑한 선수들로 이뤄졌어요. 반면 우리는 젊고, 패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요령과 경험에서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서울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 경기결과  
스페인 97-53승
캐나다 76-70 승
브라질 102-87 승
중국 108-57 승
이집트 102-35 승
푸에르토리코 94-57 승
소련 76-82 패(준결승)
호주 78-49 승(동메달 결정전)

최_ 신장 차이도 컸습니다. 

오_ 그들은 정말 거대했습니다. 
(소련은 아비다스 사보니스(223cm), 빅토르 판크란시킨(221cm), 올렉산더 비엘로스티에니프(213cm), 발레리 호브로프(211cm) 등 210cm 이상 장신 선수를 4명 보유한 반면 미국에는 데이빗 로빈슨(216cm)을 제외하면 210cm 이상 선수가 없었음)

최_ 경기 초반 대니 매닝(208cm, 1988년 캔사스 대학을 NCAA 우승으로 이끌며 MOP에 선정되었고, 1988년 L.A. 클리퍼스에 NBA 드래프트 전체 1번으로 뽑힌 선수)이 파울트러블에 걸리는 등 경기가 약간 꼬이면서 어렵게 풀어갔습니다. 

오_ 우리는 센터에서 뛰는 ‘제독’ 데이빗 로빈슨도 조금 좋지 않았고, 공격적인 면, 리바운드 면에서 부진했습니다.

최_ 그리고 3점슛도 많이 허용하며 결국 패했습니다. 경기 후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_ 저 개인적으로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국가를 대표했고,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는데 패해 실망스러웠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 3점 슈터 중 한 명이었던 리마스 쿠르티나이티스가 3점슛 4개 포함 28득점을 올렸음. 쿠르티나이티스는 1989년 NBA 올스타 3점슛 콘테스트에 초청을 받기도 했는데 NBA 역사상 유일한 비 NBA 출신 참가자로 남아있음.  
당시 미국과 소련 경기 주요 선수 기록은 소련 쿠르티나이티스 28점 3점 4개, 샤루나스 마르출리오니스 19점, 사보니스 13점 13리바운드, 미국 로빈슨 19점, 12리바운드 2블록, 멀리 15점 7리바운드, 매닝 무득점)

최_ 미국 선수들이 동메달을 호텔에 두고 왔다는 설과 버렸다는 설도 있던데요.

오_ 사실입니다. 두고 온 선수들도 있고, 강에 버린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최_ 그리고 1년 후 유니버시아드에서 소련에게 복수에 성공했습니다. 

오_ 우리가 박살을 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는 주요 선수들 빠졌습니다. 그래도 그 경기가 저에겐 힘이 되었습니다.


최_ 1988년 올림픽이 열렸던 장소가 현재 서울 삼성의 홈 구장인데 다시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오_ 약간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많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1988 올림픽 로고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이번에도 다시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최_ 소련 대표팀이었던 사샤 볼코프(알렉산더 볼코프)와는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함께 뛰었는데 당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오_ 없습니다. 하지만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함께 뛰었던 사보니스와는 당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보니스와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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