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 MLB일기-9 클리블랜드에서 보스턴까지, 후반기 의미있는 출발
페이지 정보
작성자 털보티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15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후반기 첫 선발 등판이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의 류현진.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지만 그는 팀 승리를 앞세웠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원정 경기를 마치고 필라델피아로 이동 중에 쓰는 일기입니다. 오늘(15일, 한국시간) 저의 시즌 11승을 기대하신 분들이 많았을 텐데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선수 입장에서는 개인 성적보다 팀 승리가 우선이고, 팀이 어려운 상대를 맞이해 위닝시리즈를 거둔 부분에 더 높은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물론 승수까지 챙겼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죠. 내야 수비의 실책이, 제 뒤를 이은 불펜 투수의 구위가 좀 더 안정적이었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마운드에서의 저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가장 간단한 대답은 제가 깔끔하게 삼진 잡고 타자들을 돌려 세웠으면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승수를 챙기지 못했다는 건 말 그대로 핑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감독님이 8회에 올라가라고 하셨다면 전 무조건 마운드로 향했을 겁니다.
길고 긴 시즌을 치르다보면 그라운드 안에서 다양한 희로애락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제게 도움이 되는 플레이가, 때로는 제가 팀에 도움이 안 되는 피칭으로, 또 때로는 저를 힘들게 하는 경기들이 펼쳐지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제가 좋은 경기를 해내는 것입니다. 수비 실책, 불펜의 구위 난조 등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는 월드시리즈 리턴 매치라고 해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랑 정규시즌은 엄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더라고요. 준비 과정부터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월드시리즈랑은 온도 차이가 있었어요. 어느 경기가 더 중요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단기전과 정규시즌의 차이 정도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오늘 1회 말 상황은 참으로 복잡다단하게 흘러갔습니다. 공의 코스가 예상과 빗나가면서 3타자 연속 안타를 허용했는데 수비 실책, 시프트 등은 투수에게 ‘복불복’ 같은 상황이라 전혀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당시 상황에서 이런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장타만 맞지 말자’, ‘최소 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하자’라고요. 우여곡절이 깊었던 1회를 2점이나 내주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을 때는 그냥 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누구 탓이 아닌 순전 제 자신에게 열이 받았어요. 모든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저를 짓눌렀던 셈이죠.
그동안 여러 차례 말씀 드렸듯이 저는 구속으로 승부하는 투수가 아닙니다. 보스턴처럼 공격이 뛰어난 팀을 상대할 때 그들을 힘으로 누를 생각?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장타력이 좋은 선수들을 상대로 구속으로 압박할 만큼 어리석지 않거든요. 원래 하던 대로, 흔들림 없이, 플랜에 맞춰 투구하는 데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이후의 상황은 제가 컨트롤할 수 없으니까요.
오늘 제대로 경험한 팬웨이파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다른 구장에서는 홈런이 될 수 있는 공이 안타가 되고, 스트라이크로 선언될 만한 공들이 볼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보스턴 선수들이 바깥쪽 체인지업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해 ‘요리조리’ 잘 피해서 던졌고, 체인지업의 구위가 괜찮은 것 같아 커터보다 체인지업을 더 많이 구사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올스타전 이후라 오늘 경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하던데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올스타전에서 던지지 않았다면 전반기 마지막 등판 후 거의 열흘 만의 실전 등판이라 투구 감각을 이어가는데 애를 먹었을 겁니다. 올스타전에서의 1이닝을 후반기 첫 등판을 앞둔 불펜피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보스턴전을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메이저리그 데뷔 후 7시즌 만에 경험한 올스타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내셔널리그 올스타팀 클럽하우스에 들어섰을 때 뭔가 수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클럽하우스 환경, 수준, 문화 면에서도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요.
‘천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놀란 아레나도(콜로라도 로키스)와의 만남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레나도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먼저 제게 사진을 찍자고 하더라고요. (오)승환이 형한테 보내줘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저도 제 휴대폰으로 ‘천적’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기념으로 소장하려고요. 아레나도가 올스타 미디어 데이 때 한국 기자들과 많은 인터뷰를 했다면서 저에 대해 좋은 이야기 많이 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저는 그에 대해 좋은 이야기 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죠(류현진은 당시 한국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아레나도를 만나게 되면 꿀밤 한 대 때려주겠다고 말했다). 놀란 아레나도는 실력은 물론 인성도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자연스레 호감을 갖게 될 만큼요.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올스타전은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영원히 제 가슴 속에 각인될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선발 선수로 1회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는 여느 경기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설렘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긴장하기보다 즐기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아내, 형과 함께 레드카펫을 밟은 것도 잊지 못할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아내하고만 레드카펫에 서야 하는 줄 알았는데 행사 진행자가 가족들이 함께 해도 된다고 귀띔해서 부모님, 형과 함께 트럭을 타고 퍼레이드를 하며 레드카펫 장소로 향했습니다. 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퍼레이드를 이어가는 기분은 정말 특별했어요. 부모님도, 저도 그 상황들이 믿기지 않았고, 살짝 뭉클한 감정도 들었고요.
올스타전을 비롯해 보스턴전 등판까지 아낌없이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필라델피아 원정을 마치고 LA로 돌아가면 또 다른 모습의 류현진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